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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사진

시래기 된장국/ 안광승

by 안광승 2014. 2. 15.

어제 저녁에는 둔산전자타운 상가에서 영업을 하는 몇몇사람과 롯데백화점 뒷편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시래기 된장국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시래기국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옛날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시래기국이 생각났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때 어머니는 나를 외삼촌댁에 맡겨놓고 재혼의 길을 떠났다.

외갓집은 비교적 부유한 집이었고, 사춘들과 뛰어놀고 돌아다니는 재미로 나는 외롭거나 우울하게 지내지는 않았고 왠만한 외로움은 나 스스로 이겨냈다.

 

그러나 국민학교 6학년 되던해, 나를 귀여워 해주시던 외삼촌께서는 위암으로 3번이나 재수술을 하시고도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비싼 대학병원의 장기간 병치례로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가산은 모두 압류되  마침내 어느날 법원 집달리가 강제집행하면서 모든가산은 집밖으로 내던져 졌고 대문은 굳게 잠그어졌고 어느 구석에도 내가 들어 갈 빈자리는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암담한 시간이 흘러가고 나는 대문옆 한쪽에 별로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앉아 그냥 그날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고, 외숙모님과 사춘들은 대문밖에 가제도구챙기면서 법원 집달리원들과 말다툼을 하며 울고 불고 통곡하고 있었다. 

 

이때 나를 구하려고 나타난 사람이 나의 할머니와 두째 삼촌이었다.

"광승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놀라 돌아보고 나는 대성통곡을 했고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할머니에게 매달렸고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큰아버지댁으로 갔으며 그때부터 나는 그곳에서 어린시절의 추억과 인생의 밑바탕을 배우며 성장했던 것이다.

 

나를 데리고 큰집에 들어서자마자 큰어머니와 할머니는 집안이 떠나갈듯이 떠들며 싸우셨다.

나는 가만히 들어보니 싸움의 이유는 나를 데리고 온 이유 때문이었다.

큰어머니는 "지금도 식구가 13명인데 조카** 까지 어떻게 키우느냐" 하는 것이고, 할머니는 "내 핏줄이고 내 ** 인걸 데리고 와야지 어떻게 하는냐" 하는 것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 숨고 싶은 순간이 흘러 갔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두째삼촌이 껴안아 주면서 내 귀를 막아 주었다.

이런 고비를 넘기면서 그래도 나는 슬기롭게 적응해 나가며 큰집 생활에 익숙해 졌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내가 공부라도 잘해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살게되었다.

 

큰어머니는 지금 생각해도 음식 요리솜씨 만큼은 일류요리사였다.

맛없는 것이 없었고, 언제나 음식량이 나에게는 좀 부족했는데 큰어머니가 나들이 가고 없을때면 할머니가 밥을 차려주셨는데. 그때는 배불리 먹을 수는 있어서 좋지만 솔찍이 할머니가 끓여 준  국은 큰어머니가 해주신 것보다는 맛이 없었는데 할머니가 항상 해 주시는 음식은 멸치를 넣어 끓인 시래기 된장국이었다.

꼭 오늘 저녁에 식당에서 먹은 그 맛이었다.

 

내가 집안에서 소리치며 투정부릴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할머니뿐 이었는데 나는 그래도 나의 존재가 큰집에서도 큰소리 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해보듯 이렇게 소리 질렀다.

 

"할머니 국에다 멸치 넣치마 또 멸치 넣어서 국 끓이면 안먹을거야"

어린시절 그 순간 소리 칠때가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고, 한편으로는

할머니께 죄송한 생각도 들지만 할머니는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다.

지금도 시레기 된장국을 먹을 때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리운 할머니 얼굴이 국속에 그려진다.

 

 

                                                                  글 씀...안  광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