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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광 승 카 페
(플)시와 음악

[스크랩] 숙박계

by 안광승 2009. 1. 16.

 * 사진출처 : 네이버포토

   사진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강원도 정선 여량리 '아우라지역' 앞 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숙박계

詩 / 이덕규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의 自序 중에서

 

■ 이 시를 읽다보면 숫눈이라는 멋진 우리 말이 나옵니다.

숫눈- "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을 뜻합니다. 발음은 순눈으로 읽는답니다.
새벽에 나가보면 눈이 소복이 쌓여 있지요? 아무도 밟지 않은 바로 그런 눈을 숫눈이라고 합니다.
'숫'은 "더럽혀지지 않아 깨끗한"이라는 뜻을 더하는 앞가지(접두사)입니다.
숫처녀, 숫총각...에 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뭇 사람들의 발길로 그 숫눈이 곧 '헌눈'으로 만들어지겠지요.

 

내가 사는 지방에는 어제 일기예보대로 밤새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신새벽에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한 경비원 아저씨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 계단의 눈을 먼저 치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 내리면 늘 염려되는 길목 계단인데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치우는 경비원 아저씨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자주 다니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참, 눈 내리는 겨울 밤

객지의 여관 혹은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있는지요?

예전에 나는 태백여행시 큰 눈을 만나 일찍 여관에 몸 맡기고

창문 너머로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하염없이 바라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른 저녁인데 거리엔 인적도 뜸하고 힘겹게

고원의 철길을 올라오는 태백선 화물열차의 기적소리는 왜 그리 애처롭게만 들리는지.

객지에서 쓸쓸하고 긴 겨울 밤을 혼자 지세우기가

외로워서 여자 하나를 사고 싶었지만

사랑도 없이 여자와 몸을 섞는다는 것이 동물처럼 느껴져 그만두고

술이나 한 병 사왔습니다.

청승맞게 혼자서 또박또박 떠난 겨울여행. 그때가지만 해도 젊었었나 봅니다.

 

 

 

 


 

출처 : 숙박계
글쓴이 : 바람소리 申 相 均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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