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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정조대왕

by 안광승 2008. 11. 19.

 

 

 

조선왕조 27대 왕 중에서 대왕칭호를 받으며 존경받는 두분이 계신다.

그첫째는 세종대왕 이고 두번째는 정조대왕 이다.

반면, 왕이라 칭하지 않는 두분도 계신데 연산군과 광해군 이다.

 

 

저자는 대왕 칭호를 받는 왕의 업적과 통치 철학은 어떠했나를 면밀히

조사 하여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에서

이글을 쓰며, 또한 왕의 칭호조차 받지못한 두분들의 잘못은 무엇무엇

이었나 를 알아 보기로 한다

 

먼저 세종대왕께서 는 잘 알려진대로 훈민정음을 만들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만드신분 이라고 우선 알려져 있다.

그리고 32년 동안 통치를 하시며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원래 왕세자는 형인 양녕대군(讓寧)이었으나, 아버지 태종은 충녕(세종)

이 총명하여 왕에 적합 하다고 판단해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했다.

같은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을 바탕으로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 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 했는데, 우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첫번째 로

신하들 중심이였던 의정부의 권한을 대폭축소 하고,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왕에대한 자문,교육과 각종 학술연구,서적편찬

담당 하는 기구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정인지 등 집현전을

통해 배출학자들이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는데 주역

이되었다. 그와 동시에 왕권은 강력하고 확고히 변해가고 있었다. 

 

한편 세종은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의 측면에 까지 확대 했으며,

효행록,삼강 행실도 를 간행 보급해 유교적인 사회질서를 확립 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인쇄,화약 기술등 과학기구

발명등은 현제 까지도 잘 쓰여지고 있는 유산이다. 

 

말년에 두 아들과 왕비를 잇달아 잃고 자신의 건강이 크게 악화 되면서

건강에 게을리한 자신을 꾸짖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던 것이었다.

5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역대 어느 왕보다도 백성을 생각하고 업적을 남긴 세종은 후세에 대왕의

칭송을 받게 된다.

 

 

다음은 정조대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정조(正祖)는 조선왕조의 제 22대 왕이시다.

정조대왕 하면 우선 탕평책으로 당파싸움을 중단시킨 왕으로 유명하다.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으며,

아버지 사도세자가 소론을 지지해, 노론을 지지 하는 영조에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으며, 할아버지 영조의 배려로 그를 대신 해서 8살 되던 해에

왕세손에 임명 되고 그후 영조가 승하하자 25살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24년 동안을 통치를 하셨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 의 복수를 하는한편, 능력과 학식있는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수 있는 친위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왕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 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궁궐을 호위하는 숙위대장과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업고 이른바 세도정치를 하고 정권을쥐고 흔들자

정조는 그에게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갈 것을 권고했다.

 

정조는 노론세력의 봉건적 특권을 약화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경제를 우선하여 세금철패를 과감히 진행하고, 상권과 화패의 중요성 을

백성들 에게 알려 경제를 살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또 당파싸움을 척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쓰며 

당쟁을 없애기 위해  12년에 이르는 동안 지속적으로 외척세력을 비롯한,

특히 노론세력을 제거, 약화 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 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기구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세력을 형성

시켜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임금을 보좌할수있는 강력한 정치기구

로 육성하였다.

 

또 영조때부터 시작된 문물제도의 보완및 정비작업을 계승,경제를 살리고

우수한 인재를 뽑기위해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뤄 상과 벌을 직접내려서

소외받던 많은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 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평민에게 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배부른 백성,양반은 물론, 중인,상인,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를

즐기며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격상시켜,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 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화성을 건립하고  과학적 행궁 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 하고

해결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관리의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대한 정부통치력이 강화되고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를 신설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인 성격을 약화시켜서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 하였다.

 

의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직접 환자의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는 어렵게 역경을 헤치고 여러가지 개혁을 이뤘으나 49살 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너무 똑똑하여

왜구에 의해 피살 되었을것 이라는 소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정조대왕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일본이 우리를 넘보지 못했을것 이란 말

이 있는데 이는 일정시대때 일본인들이 규장각(현제 서울대학교 도서관)

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을 보고 놀라서 일본인 들이 한 말이라고 한다.

아뭇튼 우리는 그를 정조대왕 이라 칭한다.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은 백성을 잘 살게하기 위하여 끊질긴 집념과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통치를 위한 왕권을 확립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업적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효를  실행하는등 인간적인 도리

를 다 함으로서 후세에 그분들을 대왕으로 칭하며 존경하는것 같다.

그러나 두분 다 건강을 돌보지 않아 장수하지 못한걸 보면 완벽에 가까운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도 없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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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연산군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한다.

 

성종의 큰아들 이시며 어머니는 윤기묘의 딸 폐비 윤씨이다.

비는 영의정 신승선의 따님이시다.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사된 뒤인 1483년(성종 14년)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94년 12월 성종이 승하 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초 에는 강력한 병기를 만들게 하여 변방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야인(野人)을 토벌 하는등 국방에도 많은힘을 썼다.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잃게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로 감정이 앞서면서

포악해지고 대사를 그르쳤지만 그의 총명함과 왕도의 자세는 어느시대의

왕 보다도 더 어질고 인자하고 인간적 이었다.

그러나 모정에 굶주려 장록수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것이 천추의 한이 되는

폐위의 길로 가는 수순이었기도 하다.

 

재위중 1504년 에 어머니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관련 됬던자 를 색출 하여

무오,갑자 사화를 일으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관 (言官) 제도를 크게

축소 했으며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 되자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

도록 금지 시키기는 등 포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마침내는 1506년 성의한,박원종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두째아들 진성

대군(중종)을 왕으로 세움에 따라 왕위에서 쫒겨나 군(君)으로 강등된후에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고, 묘는 서울특별시 방학동에 있다.


 

 

다음은 광해군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한다.

 

선조의 두째아들 이며 어머니는 공빈(恭嬪)김씨이다.

비(妃)는 판서 유자신의 따님이다.

당시 조정에선 공빈김씨 소생의 임해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광폭하다

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뒤 1591년(선조24) 정철을 비롯한 대신 여러명이 광해군을 세자로책봉

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선조가 인빈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 하여 책봉 이

지연 되다가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다.

 

즉위후 곧 임해군을 교동(橋洞)에 유폐하고 유영경을 죽이고 당쟁 패해를

막기 위하여 이원익을 등용하여 초당적으로 정국을 운영 하고자 했다.

1617년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건의 하고 김개시란 궁녀의

꼬임에 빠진 왕은 이듬해 인목대비 를 삭호하여 서궁에 유폐 시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로 명,청의 국제 실리정책

으로 대처 하기도 했다.

또한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칭송을 받기도 하고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등 전쟁때 없어져버린

여러 서적을 다시간행하고 무주 산성에 사고(史庫)를 건립해 소장했다.

또 광해군 재위 15년간 행해진 대북정책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정기반의 재건과 민생안정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 하고 후금과 도

탄력있는 외교관계를 추구하여 외교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재위기간중 영창대군등 형제를 살해 하고 인목대비 를 폐

하는등 폐륜의 임금으로 간주되면서 평소 대북파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

이귀,김좌점등이 능양군(綾陽君)을 받들어 반정을 일으킴에 따라 폐위되어

군(君)으로 강등되어 강화,제주도 등에 유배되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 모두 백성을 위하는 마음, 나라를 지키는 노력은 훌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장록수를 만나면서 포악한 군주로 변해 쫏겨나게 되고

광해군은 김개시를 만나고 부터  폐륜으로 인한 실정을 함으로 쫒겨 나는데

모두가 자기 절제력과 주색을 다스리지 못함이 더 큰 원인이라 볼수있다.

 

 

 

위 네분의 왕들이 행한 정치와 왕권, 연구와 노력, 방탕과 절제등을 보면서

우리는 분명 배울것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실천 할수도 있다...

  

..............................................................................안광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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